





불가능한 차원의 가능성에 관한 변주
사용자ㅣ심혜린
일시ㅣ2013년 5월 22일-6월 4일
관람ㅣ오후 1시-7시 (월) 휴관
오프닝ㅣ5월 22일 오후 7시
포스터/리플렛ㅣ리사익 Leesaik
글ㅣ유은순
후원ㅣ문래예술공장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흘러가기 때문에 인간은 매 순간 삶을 살아가기 위해 세계에 의미를 부여해야만 한다. 이를 위해 인간은 외부의 다양한 정보를 수용하고 재조합할 필요가 있다. 심혜린 작가는 여기서 가장 내밀한 지점을 탐구하고자 한다. 즉 인간이 세계를 어떻게 체험하고 지각하는지의 과정을 작품에 담고자 한다. 작가는 인간이 이성, 즉 언어를 매개로 세계를 지각하지 않고, 감각을 통해 외부의 사건을 수용하고 이를 번역하며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감각이란 무엇보다 몸의 경험과 관계하므로 모든 존재들이 하나의 대상에 대해 동일한 느낌, 감정을 공유할 수 없다. 동일한 인물이더라도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다른 경험을 하게 될 수도 있는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각 ‘방식’은 각 개인 혹은 집단마다 나름의 통일된 체계를 가진다. 요컨대 지각 방식이 감각적이라고 해서 무질서하다고 치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감각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체계를 가지지 않으므로 언어로 명확하게 설명될 수는 없다. 그러나 감각은 이성과는 다른 감각적 질서, ‘감각-체계’를 가진다. 작가는 이렇게 개별마다 서로 상이하게 드러나는 지각 방식을 ‘채널’이라고 명명한다. 작가는 모든 이들의 채널을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작가 자신의 채널을 시각화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여기서 문제는 세계와 마찬가지로 감각이 시·공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를 이룬다는 것이다. 따라서 감각-체계를 완벽하게 규명하는 것은 불가능한 시도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자신의 첫 개인전인 <불가능한 차원의 가능성에 관한 변주>를 통해 자신의 감각-체계를 시각화하고자 한다.
< Aleph of Nirvana >(2012)는 이러한 시도의 첫 출발점이다. 빈 캔버스는 카오스적이지만 그 어떤 의미도 부여받지 못한 세계의 일부이다. 작가는 빈 공간에 선과 면, 색을 구성해나가면서 자신의 지각 과정을 시각화하고자 한다. 이는 과거에 존재했던 그 어느 시점의 시각화가 아니라 작품을 그려나가는 매 순간에 발생하는 지각 과정의 시각화이다. 감각은 멈추지 않고 세계와 관계를 맺으므로, 작품 내에서의 요소와 요소의 관계 혹은 요소들의 집합들의 관계를 표현하는 작가의 감각 역시 변화한다. 그러므로 작품의 조형적 요소들은 끊임없이 수정·보완되고 전복하기를 반복한다. 감각-체계를 시각화하는 치열한 작업의 과정이 중첩되면서 어느 순간 작품의 각 요소들이 미묘한 균형 관계를 가지게 되는 상태, 즉 더 이상 더할 곳도 없고 뺄 수도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는 불가능한 시도로 간주되었던 ‘감각-체계의시각화’에 대한 일차적인 완결의 상태이다.
그러나 세계를 지각하고 번역하는 일은 우리의 삶 동안 중단될 수도, 어떤 단일한 체계로 통합될 수도 없으므로 다른 작품들로 미끄러져나간다. 「불가능한 차원의 가능성」이라는 텍스트는 작가가 < Aleph of Nirvana >에서 막연히 시도했던 감각-체계 규명의 당위성을 모색한 글이다. 작가는 여기서 감각-체계의 방식을 ‘추상’하는 원리를 탐구한다. 작가는 세계를 지각하는 방식이 감각적이라는 점에서 감각-체계는 ‘추상’적이며, 이를 번역하기에 가장 적합한 방식 역시 ‘추상’이라고 주장한다. 이 시점에서 「불가능한 차원의 가능성」이라는 텍스트의 역설이 발생하는데 ‘추상’의 원리를 탐구하는 방식이 어쩔 수 없이 언어를 매개하여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이 텍스트는 관객에게 그 의미의 충만함을 담지한 채 드러나지 않는다. 본 전시의 제목이 암시하듯, 작가는 이 텍스트의 의미를 취하면서도 텍스트를 변주할 때는 그 의미를 배제하고 텍스트 자체를 ‘질료’로 삼아 다른 작품들로 변주한다. 이는 관객에게 작가의 ‘감각-체계’를 언어를 매개하지 않고 드러내기 위함이다. <불가능한 차원의 가능성에 관한 변주>시리즈는 이 텍스트를 해체하고 이를 재배열하고 가공하여 전시한다. 이로써 작가는 작가 자신의 감각-체계를 시각화함은 물론, 시각화된 작품을 감상하는 관객이 스스로의 감각-체계를 체험하도록 유도한다.
<불가능한 차원의 가능성에 관한 변주 #1>(2013)은 텍스트를 문장 단위로 해체하고 작가가 설정한 아웃라인에 의거해 재배열한 작품이다. 작가는 최소한의 기준만을 제시할 뿐 글자와 글자 사이의 간극은 임의로 설정되도록 내버려둔다. 이를 통해 서로 다른 ‘길이’를 가졌던 문장은 글자들의 서로 다른 ‘간극’으로 치환되고, 각 문장은 의미의 유기적 관계를 잃고 부유하게 된다. 그런데 텍스트가 해체된 그 순간부터 글자들의 집합은 새로운 기호 체계로 조직화된다. 때문에 관객은 처음 이 작품을 접할 때 텍스트를 ‘읽기’보다 선들의 집합체로 ‘직관’하게 된다. 작품을 심도 있게 들여다볼수록 관객은 단어의 인지 - 해체 - 시각적 재구성을 반복하게 되면서 스스로의 감각 방식을 반추한다.
그에 반해 <불가능한 차원의 가능성에 관한 변주 #2>(2013)는 「불가능한 차원의 가능성」을 문단 단위로 해체하고 이를 가독할 수 없도록 검은 다각형으로 채운 작품이다. 그러므로 관객은 텍스트가 담고 있는 내용을 유추할 수조차 없으며 단지 흰 종이에 채워진 검은 사각형만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이는 대상과 맞닥뜨리는 최초의 순간을 시각화한 것이다.
<불가능한 차원의 가능성에 관한 변주 #3>(2013)은 작가 자신이 세계를 매 순간 경험하면서 발생하는 감각적 충동을 언어로 번역하고 이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그러므로 각 단어들은 유기적인 관계를 맺지 않고 독립적인 지위를 점한다. 관객은 검은 바탕의 하얀 글자들을 독해하려 하지만, 순간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글자들을 독해하기는커녕 시각적 점유만을 잠시 목도할 뿐이다.
「불가능한 차원의 가능성」은 추상 원리의 탐구를 위해 합리적 언어를 빌려온다. 그러나 감각의 추상성과 표현 방식으로서의 ‘추상’ 모두가 비합리적이라는 점에서 이 텍스트를 통해 작가의 목적을 달성하기란 어려워 보인다. 그러므로 작가는 <불가능한 차원의 가능성에 관한 변주 #4>(2013)를 통해 ‘시적 언어’로의 번역 가능성을 모색한다.
<불가능한 차원의 가능성에 관한 변주 #5>(2013)와 <불가능한 차원의 가능성에 관한 변주 #6>(2013)은 오브제를 해체하거나 재구성함으로써 가장 단순하게 감각-체계의 시각화를 의도한 작품이다.
이렇듯 작가는 다양한 매체를 경유하여 감각-체계의 규명을 의도하지만, 감각 자체가 표상 불가능한 것이라는 점에서 모든 작품들은 목적 달성에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이러한 맥락에서 심혜린 작가의 모든 작품을 실패의 ‘흔적’으로 평가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가 ‘최고’의 의미 획득에 실패했을지는 몰라도 작품이 완성되는 ‘과정’에 한해서는 ‘최선’의 의미를 부여한다. 또한 그 실패의 과정을 은폐하지 않고 작품 안에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작업은 ‘깊이’를 지닌다. 그러므로 필자는 작가를 불가능해 보이는 시도를 열망하는 이카루스적 공상가로 간주하기보다 새롭게 발생하는 현재의 순간과 그 과정을 음미하는 삶의 미식가로 보고자 한다. 예술가는 자신만의 언어를 작품을 통해 구축하는 것을 본업으로 삼는다. 심혜린 작가는 자신의 언어를 구축하기 이전에 자신의 감각-체계 과정을 해명하고자 시도한다. 그러므로 심혜린 작가의 예술적 언어는 하나로 고착되지 않고 계속되는 실험을 통해 변화하고 발전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그의 작업은 어떤 다른 작가들보다 내적으로 첨예한 충돌을 감내해야 할 뿐만 아니라 삶의 매 순간을 포착할 수 있는 근면함도 요청된다. 이는 심혜린 작가의 다음 전시가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글_유은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