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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일람 차혜림
형태일람
사용자ㅣ차혜림
일시ㅣ2017년 4월 22일-5월 6일
​오프닝ㅣ4월 22일 (토) 오후 6시
관람ㅣ오후 1시-7시 (월) 휴관
​관람료ㅣ2,000원
​포스터&리플렛ㅣ리사익 Leesaik
​글ㅣ정여은

차혜림은 관찰과 실험을 통해 개인에게 일어난 부적응의 문제, 불안을 분석하는 임상 심리학 도식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특히, 정보전달을 위해 사용하는 다이어그램의 형태적 형식을 드로잉으로, 다시 조각으로 연결한다.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다이어그램의 두가지 특징을 강조한다.

1.한 발을 땅에 대고 다리를 쭉 뻗어 몸을 기울이다.

첫 번째 분류는 균형을 잡으려 힘을 쓰는 과정을 문장형으로 표현한 것이다. 문장의 주체는 사물인지 사람인지 언급되지 않았지만 기울기를 지닌 채 본인의 무게와 중력을 감당하고 있다. 드로잉 북에서는 실제로 입체물이 일정한 각도를 가지면서도 기립하는 상태를 연구하는  평면 작업을 담았다.

 

2.정처없지만 경험하거나 지각할 수 있도록

이 문장은 ‘표류하다’라는 어휘를 사전뜻으로 풀어 쓴 형태이다. 이 부분에서는 다이어그램의 가볍고, 둥둥 떠 있는 특징을 다룬다. 

서문

정여은(프리랜서)

꿈을 꾸었다. 가슴팍에 이름표가 하나 달렸는데, 손으로 떼어내 손바닥에 올려놓고 보니 흰색 점토가 켜켜이 달라 붙어있었다. 나는 화장실로 가서 흐르는 물에 점토를 씻어냈다. 그러자 이름표는 평범한 물건에서 살아 움직이는 하나의 생명으로 탈바꿈했다. 이름표에서 이름이 되었다. 이 글을 구상하고 있을 때, 불현듯 위의 꿈이 떠올랐다. 사람의 마음과 내면을 바라보는 나의 은밀한 관점을 투영했고, 그 관점을 작가의 작업에서 엿볼 수 있다고 느껴서였을까. 아니면 무엇인가를 덧붙이고 떼어내는 일련의 단계를 거친 후, 새로운 형태의 결과물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그의 작업과 닮았다고 여겨서였을까.

 

알 수 없는 꿈을 꾸고 어렴풋이 해석하듯, 나는 작가의 작업을 나름대로 읽어보려고 한다. 따라서 이 글은 다른 이들보다 차혜림 작가의 전시에 조금 일찍 초대받은 관람객이 조금은 애정을 담아 쓴 감상문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의 작업과 차츰 친해지면서, 크게 두 가지 줄기를 더듬을 수 있었다. 첫째는 도식, 도표, 다이어그램 등 심리학적 데이터와 작업이 맺는 관계이고, 둘째는 그것들이 작업에 반영되었을 때 가지는 형태와 물성의 변화다.

 

작업의 배경에는 심리학 연구가 등장한다. 하나의 추상으로만 받아들여도 상관없지만, 그가 심리학적 도식이나 도구에 가지고 있는 관심을 이해하는 것도 작업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하나의 방법이다. 사실 실증주의적인 심리학과 미술의 만남은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날 과학의 외피를 두른 심리학도 처음에는 철학이라는 형이상학적인 학문에 속해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둘의 거리는 생각보다 그리 멀지 않다. 심리학은 철학에서 독립한 이후 학문적 위상을 확립하기 위해 과학으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하는 길을 택한다. 실험실에서 변인과 수치를 다루고 각종 도표, 통계, 다이어그램, 검사 척도를 만들며 차별화된 학문 체계를 구축해온 것이다. 그 노력의 바탕에는 추상적이고 비가시적인 ‘마음’을 가시적인 데이터로 치환하여 그 실체에 가까이 다가간다는 믿음이 있다.

 

작가는 개인의 개별성에 보편적으로 접근하는 심리학의 방식과는 역으로, 객관적인 데이터들에서 사적인 지점을 포착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의 필터를 한 차례 거친 뒤, 딱딱한 데이터들은 사뭇 다른 성격을 얻는다. 인간에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이 메타적이고도 평면적인 도구들이 이제는 물성을 지닌 오브제가 되는 것이다. 주관성에서 객관성으로 부단히 옷을 갈아입은 그 영역을 한 꺼풀 벗겨, 다시 주관의 형식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아무런 색깔도 표정도 무늬도 없는 데이터들은 외부의 해석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존재다. 이제 표백된 바탕에 색을 칠하면 된다. 자료와 도구들은 개인의 사적인 경험을 설명하는 단초로서 기능하는 셈이다.

이를테면 <아미달라>에서는 뇌의 변연계에서 감정을 조절하고 공포를 관장하는 부위인 편도체가 역동적으로 꿈틀댄다. 무미건조한 선으로 표현되어 백과사전이나 심리학 교재에 숨어있던 단조로운 형태의 편도체는 작가의 손에서 질감, 색깔, 부피를 획득하여 하나의 입체적인 물질로서 우리의 눈앞에 나타나게 되었다.

<연결과 방사> 역시 마찬가지로 2D인 다이어그램의 선과 면을 물리적 공간에 옮겨놓았다. 다이어그램의 밋밋한 평면은 세심하게 선별된 요소들을 통해 특유의 입체감을 얻는다. 화살표처럼 방향성을 매개하는 요소가 지시하는 직접성은 제외되고 새로운 방향성이 공간 안에서 펼쳐진다.

 

<평면으로부터>에서 눈에 띄는 것은 색이자 질감을 부여하는 가죽이라는 재료다. 파랑 계열의 인조가죽은 굳건한 나무 지지대와 차가운 철제 틀 사이에서 이질적이면서도 부드럽게 어우러져 있다. 마치 나무 위에 돋아난 털 같은 생경한 촉감이다. 작가는 촉감이나 물성에서 개인적인 인상을 주는 재료들을 쓴다고 한다. 이번에는 ‘하이드로테라피’에 관해 찾아보다가 인조가죽을 골랐다고 하는데, 주류 심리학에서 배척되지만 어쩌면 대중들과의 거리는 더욱 가까울지도 모르는 이러한 유사 치료의 포지션이 진짜 가죽은 아니지만 일상에서는 오히려 더 자주 쓰이는 인조가죽의 쓰임과 의미심장한 쌍을 이룬다.

 

작가의 주관적인 선택을 거친다고 해서, 개인적인 서사가 전면에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는 자서전적 발언의 직접적인 인용을 멀리한다고 밝힌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사적인 이야기’가 아닌 ‘사적인 뉘앙스’다. 질병이나 트라우마 등은 개인사적으로는 민감한 주제들이지만, 명백하거나 구체적인 이야기를 형성하기보다는 작품을 구성하는 재료나 소재로서 녹아드는 인상이 강하다. 서사가 아닌 형태로서 미묘하고 섬세한 뉘앙스를 가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가 고안한 방식에 따라 다이어그램의 수치와 각도 같은 무채색 특성들이 일련의 드로잉으로 다채롭게 태어난다. 대상은 비슷하되 다른 형태를 가진 드로잉들은 <형태 일람>이라는 제목의 드로잉북으로도 선보인다. ‘한 발을 땅에 대고 다리를 쭉 뻗어 몸을 기울이다’와 같은 소제목은 이전 작업에서 보여주었던 불안한 구조물과 연약한 지지대의 결합을 상기시킨다.

또한, 이 드로잉들에는 균일하게 짜인 다이어그램과 도식을 위시한 데이터들에서 감지할 수밖에 없는, 또는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명명되지 못한 것의 빈틈도 자리 잡고 있다. 동시에 확고한 ‘사실(fact)’과 ‘사실이라는 범주에 포함되지 못한 것’의 관계를 환기하기도 한다. 공식적인 이름을 얻은 사실과 개인적이고 사적인 경험들 사이의 틈새라고도 할 수 있다. 언뜻 촘촘하고 빽빽해 보이는 드로잉들은 희미한 공간을 품고 있다. 마치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골목길에서 지도에 나오지 않는 의외의 자리가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공간들은 앞서 언급한 ‘사적인 뉘앙스’를 덧붙일 수 있는 여지와 여유를 주기도 한다.

 

다시금 아까의 꿈을 떠올린다. 꿈의 세계를 탐구한 선구자들은 꿈이 여러 층위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다층적인 의미들이 각기 다른 무의식의 언어로 펼쳐지는 것이다. 여러 층위는 끝없이 형태를 바꾸는 변태(變態)를 통하여 새로운 의미를 획득해나간다. 그리고 차혜림 작가의 작업도 마찬가지로 다가온다

  • 공간 사일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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