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응답)
작은 호기심에서 출발한 것을 계속해서 스스로 자아내는 것. 나에게 그것에 대한 답, 또는 다른 방향의 역질문이 오고가는 것. 그것을 토대로 내가 결론을 도출하는 게 아닌 내 스스로의 질문이 계속해서 확장하는 과정.
어쩌면 대수롭지 않을
사용자ㅣ이준영
협력 기획ㅣ이현
일시ㅣ2015년 8월 8일-8월 27일
오프닝ㅣ8월 8일 오후 6시
관람ㅣ오후 1시-7시 월요일 휴관
관람료ㅣ2,000원
포스터/엽서ㅣ리사익 Leesaik
아시바, 비계, 족장: 시간과 벌린 빈틈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세상을 보여 준다는 고화질 화면과 역동적인 입체 영화를 향유하는 것을 높은 삶의 질로 연결 짓는 사회에서 우리는 자극적인 환영과 현상을 찰나에 핥을 뿐 곱씹어 사유하기 힘들다. 초 단위로 바뀌는 스크린과 현란한 네온사인, 도시 곳곳에 노출된 광고판은 시간과 시선을 블랙홀처럼 흡입한다. 이제 목표는 주어진 시간 죽이기. 흐르는 시간에 몸을 맡기고 망상과 사색을 즐기는 사람은 태만하다고 비난 받기 쉽다. 하지만 현실 같은 가상에서 벗어나 실제로 우리가 몸을 담고 있는 현실과 자주 대면하는 건 대체로 그들일 것이다.
‘아시바’를 보는 일 역시 뛰는 자가 아니라 걷는 자의 몫이다. 건축할 때 건물 외벽에 격자 형태로 매여 임시 발판 역할을 하는 아시바는 그 이름조차 생소하다. 공사 현장의 외부 사람에게는 신축 건물이 머지않아 들어선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철 구조물일 뿐, 아시바보다 중요한 건 그 안에 숨겨져 있는 새 건물이다. 하지만 이준영의 시선은 완공될 건물의 외관이나 쓰임을 상상하며 미래로 향하는 대신에 지금 공사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노동과 노동자의 삶을 추적하는 데 들어간다. 오로지 강관 파이프와 클램프로만 구축된 〈맞닿음〉은 평소 대수롭지 않게 여겨왔던 아시바의 존재에 의문을 던지는 것으로 출발한 작업이다. 일시적인 소용에 의해 호출되고 사용 가치가 떨어지는 즉시 해체되는 아시바는 한곳에 뿌리박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새로운 일터를 찾아 떠나야 하는 노동자의 모습과 흡사하다. 다른 존재의 영광스러운 순간을 구현하기 위해서 하나의 ‘소모품’처럼 사용/고용되는 처지가 더욱 그렇다. 아시바는 주로 임대하고 반납하는 식으로 쓰이는데 작가가 빌려 온 아시바에도 어디선가 묻혀왔을 흙먼지가 잔뜩 엉겨 붙어 있다. 멀찍이 입구에 서서 바라만 보건,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 구조물 사이를 배회하건 어떤 태도로 작업과 접할지는 관객의 선택이다. 중요한 것은 아시바 옆에서, 아시바를 응시하고, 아시바에 관한 생각을 시도해 보는 행위 자체다. 그것은 소위 말하는 ‘킬링 타임’과는 대조되는, 살아 있는 시간과 함께하는 일이다.
전시장 한 벽면에 붙은 〈사우디아라비아〉는 작가의 아버지가 1984년 9월 사우디아라비아에 파견 나가 시공하던 당시 현장에서 찍은 사진이다. 작가는 건설업 종사자인 아버지를 어릴 적부터 지켜봐 오며 업무가 주어질 때마다 끊임없이 이동해야만 하는 근무 방식에 의문을 품었고 바로 이 계기가 작업의 도화선이 됐다. 아버지가 입었던 셔츠를 폴리에스테르 수지로 굳히고 철가루를 뿌린 〈무게〉는 한없이 얇고 가벼운 셔츠를 묵직하고 단단하게 개조한 작업이다. 한때 노동 현장의 최전선에서 닳도록 투신했을 셔츠는 과거의 자기 위안적 영예로 잔명을 부지하며 불가피하게 녹슬어간다, 박제된 미라의 형상으로.
작가는 정주하는 노동을 최우선 목표로 삼는다거나 그러한 노동이 다른 형태의 노동보다 가치 있다고 주장하진 않는다. 어쩌면 계속해서 옮겨 다녀야만 하는 삶이 마땅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시바를 규격에서 벗어난 무질서한 상태로 흐트려 놓았듯, 일반적이라 여겼던 세태가 정말이지 온당한 것인지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고 함께 고민하고자 한다. 고찰을 제안하고, 제안 받는 관계를 맺으며 우리는 현실 같은 가상에서 고개를 돌리고 부디 가상이었으면 하고 바라는 진짜 현실, 우리 삶과 더 밀접한 세상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맞닿음’은 근본적인 전복보다는 틈을 내는 역접에 가깝다.
글_이현




(작가 노트)
아시바는 일시적이고 임시적으로 존재하며, 시공을 위한 발판으로써의 역할과 건물이나 구조물들이 안정적으로 올라갈 수 있게 외벽을 지지해 주는 지지대의 역할을 갖는다. 이러한 이유로 건물, 구조물 등을 세울 때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건물, 구조물 등이 완성될 때쯤 해체되는 아시바는 더 이상 그 현장에서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그 흔적마저 지워진다.
그런 아시바는 누군가와 너무 닮아있었다. 나는 26살이 될 때까지 열 번의 이사를 했다. 그 열 번 중 대부분은 건설업에 종사하시는 아버지의 직장 때문이었다.
어느 한 곳에 정착해 있는 것이 좋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아버지가, 내가, 우리 가족이 왜 그렇게 많이 이사를 다녔는지가 궁금해졌다. 많은 직장인들, 일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를 떠돌며 일을 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
내 작업은 떠돌아다니는 아시바 자체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나에게 왔고, 설치된 아시바는 전시가 끝나면 다시 해체되어서 임대 업체로 돌아갈 것이다. 그것은 어디에도 놓일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내가 일정 금액을 주고 임대한 아시바는 어디에도 있을 수 있다. 이곳의 구조물이 이상해 보이겠지만 이상한 게 아니다.